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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86세에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한 김계익 씨(읍내동)
“여든 넘은 나도 해냈습니다”

기사승인 [1371호] 2021.09.04  10: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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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시니어클럽 일자리 사업 병행하며 요양보호사 공부
어려움에 포기할까 생각도…“이끌어 준 모두에 감사”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가 아니라 ‘책만 덮어도’ 잊어버리는 나이, 86세. 그래도 김계익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인생에 후회 한 점 남기고 싶지 않았단다.

자꾸만 머리 밖으로 도망가는 글자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가며 책을 붙잡았고, 단 한 번에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김계익 할머니는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뛰어들면 누구나 해낼 수 있다”며 “시작만 하면 어떻게든 앞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8시간 앉아 있으려니 힘들어”
김 할머니는 당진시니어클럽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면서 요양보호사 공부를 병행해 자격증을 취득했다. 코로나19로 일거리가 줄어 다행히 당진요양보호사교육원(원장 신창재)에서 공부할 수 있었단다.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임미숙 전 당진시니어클럽 관장(당진요양보호사교육원 전임교수)의 제안으로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240시간의 이론수업을 마치고 실기시험까지 모두 치러야 했기에 86세의 나이로는 체력부터 문제였다. 김 할머니는 “3시간 앉아 있는 것도 힘든데 8시간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서 처음엔 임 교수의 제안을 거절했다”며 “한편으로는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도전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은 머릿속에 글이 하나도 안 들어오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임미숙 교수에게 그만두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다음 날 있을 모의고사만 보라더군요. 막상 모의시험을 치러보니 합격접수를 넘겼고 자신감이 생겨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게 됐어요.”

더이상 볼 수 없었던 아버지
지금은 팔순을 훌쩍 넘긴 김 씨 또한 우리네 할머니들이 그러하듯 모진 인생길을 걸어왔다. 서산 운산면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5살에 서울 노량진으로 떠났다. 당시 아버지가 순성면 부면장을 맡아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팔고 상경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는 “하루는 아버지가 친구를 만나고 오더니 사표를 쓰더라”며 “나보고 대신 사표를 내라고 심부름을 시켰던 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어 “그 길로 아버지는 공산당에 들어가 일했다”면서 “곧 6.25 전쟁이 터졌고, 가진 것 없이 당진으로 내려와야만 했다”고 말했다.

“나와 남동생은 사촌오빠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엄마는 어린 여동생과 앞을 볼 수 없던 할머니까지 모시느라 같이 못 내려왔죠. 이후 전쟁이 끝나고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어요. 아마 이북으로 가신 것 같아요.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었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어린 나이 생계 전선 뛰어들어
그때부터 김 할머니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천안의 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버는 돈은 대부분 가족 생활비에 보탰다. 기숙사에서 종종 간식을 사먹자며 동료들이 돈을 걷을 때마다 돈이 없던 김 할머니는 자는 척을 해야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김 할머니는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그는 “아이에게 밥도 못 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애 엄마를 보고 작업복을 사기 위해 모아 놨던 돈으로 쌀을 사 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 식사 중에 친구집에 쌀이 없어 밥을 못 먹는다고 아버지에게 말하니 아버지가 당장 쌀을 가져다주라고 한 적이 있다”며 “쌀을 가져다주고 오니 그제야 아버지가 수저를 들더라”고 기억했다. 그는 “돌이켜 보니 없이 살아도 조금이라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아버지를 닮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어머니를 닮은 삶
어느 날 곗돈을 탄 김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돈을 전해주기 위해 고향에 연락했다. 하지만 날이 지나도록 어머니는 오지 않았고, 사람들을 통해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다. 눈물을 훔쳐가며 천안에서 당진집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생각보다 어머니의 상태는 위중했다. 

김 할머니는 “지금 생각하니 배앓이 한다고 독한 약을 많이 먹어 위가 터졌던 것 같다”며 “곗돈을 모두 쏟아부어 어머니를 살렸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살아난 어머니는 95세까지 말짱한 정신으로 살다 찬송 한 구절을 부르고 돌아가셨다”며 “어머니 덕분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참 똑똑한 분이셨어요. 눈 감는 날까지도 가족들 전화번호 다 외우시고 길눈도 밝았죠. 저도 천안에서 공장 다닐 적에 글방에서 한자 2000자를 외우기도 했을 정도로 머리는 좋았던 것 같아요. 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거죠.”

20여 년 과수원 운영
6년 6개월 동안 공장에서 일한 그에게 어머니가 남편(강근식)을 소개해줬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싶었던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지만 회사가 망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당진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 길로 결혼해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가정을 꾸렸다. 고대면 진관2리에 사과농장을 20여 년 동안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만 평이 넘는 과수원에서 밤낮없이 일했다”며 “그래도 어디 아픈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남편 퇴직 후 과수원까지 접은 김 할머니는 교회를 다니면서 지인의 소개로 당진시니어클럽에서 지난 2017년부터 일하고 있다. 

“앞으로도 최선 다하고파”
한편 고령의 남편을 돌보며 지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요즘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배운 이론들 덕분에 남편을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졌단다. 그는 “전에는 몰랐지만 배우고 나니 남편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며 “앞으로도 남편을 보살피면서 최선을 다해 여생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도와준 분들이 많아요. 제가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준 임미숙 교수, 항상 잘 가르쳐 주고 독려해 준 김미유리 선생님, 그리고 필기한 것 보여줘 가며 공부를 도운 짝꿍 희정 씨, ‘왕언니’라 부르며 평생 살면서 못 겪어 본 대접을 받게 해 준 같은 반 친구들, 또 저보고 존경스럽다고 말하는 우리 딸(강은경)을 비롯한 가족(희일·일경·희나) 모두 고마워요. 여러분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딱 첫발만 떼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여든 넘어 해냈거든요.”

 

한수미 d911112@naver.com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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