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봉황이 날아와 바위에 앉았다 간 ‘봉암산’
[우리마을 이야기 11] 당진2동 대덕1통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이었던 곳에 아파트 3채 들어서
추석 명절에 마을 청년들이 연극공연 하기도

<편집자주>

오랜 시간 동안 터를 잡고 있는 보호수와 누구도 찾지 않는 열녀문, 그리고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들이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지도 모르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본지에서는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기획취재를 통해 기사와 영상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낼 계획이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됩니다.

 

▲ 드론으로 촬영한 당진2동 대덕1통. 이곳은 위치상 당진시내와 가까워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정겨운 농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덕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의 ‘대덕리’는 4개의 통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서도 대덕1통은 수십년 전부터 문화예술활동이 왕성한 마을이었다. 배우 차태현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차재완 전 음향감독을 중심으로 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이 매년 추석 때마다 연극을 선보였다. 김용석 전 이장은 “중학생 시절 차재완 씨와 故이철환 시장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며 “연극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여자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고 말했다. 이어 “함석집에서 공연 연습을 했고 무대 준비도 직접 했다”고 회상했다. 

김성기 통장은 “그 당시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며 “지금은 다들 객지로 나가거나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아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 안 된다”고 아쉬워 했다. 

▲ 1998년 대덕1통이 ‘4000만이 살고 싶은 시범마을’로 선정됐다.

호씨 가문의 효녀문 있지만…

대덕리는 50년 전 대덕1통과 2통으로 나뉘었다. 이후 아파트가 하나 둘 생기면서 3통과 4통이 생겼다. 김성기 통장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덕리는 분통 없이 하나의 마을이였다”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분통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 대덕1통에는 자연부락과 함께 대덕마을, 시티프라디움, 증흥S클래스 아파트가 포함돼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는 집들이 모여 있고 농사를 짓던 곳이었단다. 

▲ 대덕1통 주민들의 모습

대덕1통 내 마을은 다락골, 소송, 하송, 딧골 등으로 불렸다. 이 가운데 소송(小松)은 소나무가 많아 관에서 감시원을 두어 길렀지만 솔이 별로 크지 못해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대덕1통에는 이름 난 산은 아니지만 ‘봉암산’, ‘뾰족산’ 등으로 불리는 뒷산도 있다. 봉암산은 봉황이 날아와 바위에 앉았다 해 지어진 산명으로, 산 정상에는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세 바위의 이름은 삼형제 바위다. 읍지에 따르면 이 산은 지역의 초·중학생들이 소풍을 다니던 곳이기도 했으며, 무당들이 산신제를 지낸 곳이라고 전해진다. 

더불어 현재 대덕1통에는 호씨 가문의 효녀문이 자리하고 있다. 

김용석 전 이장은 “대덕1통에 호씨가 많이 살았다”며 “이제는 호씨가 별로 없어 옛날에는 귀하게 여겨지던 효녀문이 지금은 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 1998년 대덕1통이 ‘4000만이 살고 싶은 시범마을’로 선정됐다.

인기 좋았던 대덕 토마토

현재 대덕1통에는 원주민 가구만 130호가 살고 있다. 이들의 주 영농작목은 토마토였다. 대덕1통 주민들은 40여 년 간 토마토 농사를 지어왔다. 토마토를 많이 식재했을 때에는 타 지역에서 토마토를 구입하러 당진을 찾을 정도였다고. 김성기 통장은 “당진 말고도 다른지역에도 토마토 농사를 짓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대덕1통에서 자란 토마토의 수요가 줄었다”고 말했다. 

“일반 공판장을 통해 판매하는 토마토는 완숙되지 않은 파란 토마토인데, 대덕1통에서 나는 토마토는 완숙 토마토였어요. 맛이 좋으니 직거래로 주로 판매했죠. 먹어보면 맛의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어요. 맛이 제대로 들어 본연의 토마토 맛을 느낄 수 있었죠.”

▲ (왼쪽부터) 김용석 전 이장, 이기호 노인회장, 김성기 통장

“고향 떠나면 죽는 줄 알았던 시절”

한편 김용석 전 이장, 이기호 노인회장, 김성기 통장은 대덕1통에서 나고 자랐다. 김성기 통장은 “옛날에는 고향 떠나면 죽는 줄 알았다”며 “타지로 나갈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기호 노인회장은 “벼농사와 밭농사를 짓는 부모를 이어 농사를 지었기에 고향에서 머물게 됐다”고 전했으며, 김용석 전 이장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새마을지도자, 이장을 맡아 봉사하다 보니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고향에서 지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대덕1통이 지금처럼 화합하는 마을이기를 바란다. 김성기 통장은 “큰 바람 없이 지금처럼만 주민들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며 “이장으로서 주민들에게 도움 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김용석 전 이장은 “1990년대 중반 쯤 대덕1통이 ‘4000만 명이 살고 싶은 시범 마을’로 선정된 적이 있다”며 “그 정도로 주민들 간 화합이 잘 되고 살기 좋다”고 전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마을에도 원주민은 줄고 이주민은 늘겠죠. 지금처럼 주민들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