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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05 20:33
  • 호수 1346

민과 관이 함께 외친 “대한 독립만세!”
대호지 출신 이인정·송재만·한운석, 3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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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천안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시
서훈받지 못한 4.4독립만세운동 참여자 73명
“1~2차에 거쳐 추진한 계획적인 독립만세운동”

▲ 대호지면 출신 남상락 선생이 만든 자수태극기 이 태극기는 1919년 독립운동가 남상락(1892~1943) 선생이 대호지면·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때 사용한 것이다. 남상락 선생의 부인 구홍원 씨가 직접 수를 놓아 만든 것으로, 흰색 명주 천에 색실로 수를 놓았다. 직접 짠 명주에 손바느질로 제작된 희귀한 태극기로 지난 2008년 등록문화재 제386호로 지정됐다. 이 태극기는 1986년 10월 그의 아들 남선우 씨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출처: 독립기념관)

세 명의 독립운동가는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을 이끌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대호지면은 바다와 접해 있지만 육로가 발달하지 않아 각 문중들이 가문을 지키며 500여 년 전부터 살아온 곳이다. 부안김씨 소감공파를 시작으로 의령남씨 충장공파, 연안차씨, 길성최씨, 경주최씨, 밀양박씨, 여산송씨, 제주고씨 등이 집성촌을 이뤘으며 각 문중에서는 자제들을 가르치는 서숙과 서당을 마련키도 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의숙은 의령남씨 충장공파의 자제들을 교육하던 도호의숙이다. 이곳과 각 문중의 서당에서는 구한말 한학과 함께 항일교육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은 유생인 남주원, 남상락, 남상집, 남계창, 이대하 등은 1919년 고종황제 장례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해로를 이용해 인천을 경유, 파고다공원에서 거사된 3.1운동에 참여했다.

고향에서 독립운동 계획

유생들은 파고다 고함은 물론 고향에서도 독립만세운동 거사 의지를 굳혔다. 1차 독립운동추진위원회에는 대호지면사무소 직원들을 중심으로 한 민재봉, 강태원, 송재만, 남흥열, 이대하를 비롯해 지방유지인 남주원, 한운석, 이춘응, 남상집, 남상돈 등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했다. 2차 독립운동추진위원회는 이인정 대호지면장을 비롯한 지방 유지가 중심이 됐다.

거사일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천의장터에서 장이 서는 4월 4일로 결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4.4독립만세운동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관과 민이 함께한 독립운동의 사례로 기록돼 있다.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남기찬 회장은 “당시 대호지면민들은 3시간 동안 7km를 걸어 천의장터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분명 친일파가 존재했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신고가 한 건도 없었다고 전해진다”며 “그만큼 면민들이 자주 독립을 열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 이인정(1859~1934)

만세 시위 이끈 이인정

대호지면 사성리 출신의 이인정(1859~1934)은 현 경산시인 자인군의 군수를 역임한 후 낙향했다. 일제 강압에 의해 1914년 4월 1일부터 1919년 4월 4일까지 초대 대호지면장을 맡은 그는 제2차 독립운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해 4.4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4월 3일에는 각 마을 구장에게 다음날 도로수선을 위한 동원 목적으로 대호지면사무소 집합 공문 발송을 지시하고, 한운석에게 애국가를 작사, 등사하게 했다. 송재만에게는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게 하고, 대형 태극기를 그리게 했다. 이인정은 4월 4일이 되자 면사무소 광장에 모인 600여 명의 면민들에게 “면민들을 모이게 한 것은 도로수선이 아니라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자 함”이라며 “모두 적극 참여해 천의장터에서 장꾼과 합세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연설했다.

이에 이인정은 만세 시위를 주동한 인물로 지목돼 4월 23일 보안법과 소요죄로 체포됐다. 그는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불복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다. 하지만 기각돼 다시 경성고등법원에서 한운석, 송재만, 김양칠과 같이 상고했으나 1920년 2월 7일 기각당해 결국 징역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 송재만(1893~1951)

선서문 선창한 송재만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나고 자란 송재만(1893~1951)은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용인(소사)으로 근무하면서 독립만세운동 행동총책임자로 선서문을 선창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서문에는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몸받쳐 싸우자’, ‘우리는 끝까지 행동을 통일하고 생사를 같이한다’, ‘우리는 우리 독립운동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4.4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제소(파출소)를 습격해 일본경찰의 총과 칼을 빼앗으며 격렬하게 싸웠다. 결국 송재만은 강도죄, 소요죄, 상해죄, 가택침입죄, 보안법, 출판법, 문서위조 행사 등의 죄목으로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일본경찰은 그를 거꾸로 매달은 뒤 고춧가루 물을 먹이거나 생식기에 불을 붙이는 등 고문을 자행했다. 1919년 당시 송재만은 고작 28세의 청년이었다.

▲ 한운석(1878~1941) ※사진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 작사 및 등사한 한운석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태어난 한운석(1878~1941)은 한학자이자 훈장이었다. 1차 독립운동추진위원으로, 면장 이인정의 지시로 애국가를 작사, 등사했으며 유인물을 배포해 면민들과 함께 불렀다.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애국가 1절은 ‘백두산 정기가 하라세 솟았으니/한반도의 사해는 우리에 터전이다/반만년 역사와 삼천리 금수강산/빛나는 백의 민족 만방에 자랑하도다’이며, 2절은 ‘무궁화동산은 하느님이 도우시니/태극기 물결이 세계로 뻗어가도다/이천만 동포여 피로 뭉쳐서/억만년 내 나라를 가꾸어 가세’다. 

그는 천의주제소 습격과 기물 파괴 등 격렬한 시위로 5월 14일 보안법, 출판법 위반과 소요죄로 체포됐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했다.

남기찬 회장은 “4.4독립만세운동은 우리나라 유일의 관과 민이 합동으로 진행한 독립만세운동”이라며 “철저한 계획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어 “대호지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국가에서 선정한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고 5명의 애국지사가 서훈을 받게 돼 영광”이라고 전했다.

올해 5명의 애국지사 서훈 받아

한편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가 15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까지 국가로부터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받은 사람은 1만6000명~1만7000명으로 추산된다. 그중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126명으로 지난해에는 고병선·장익환 선생이, 올해에는 이세화·고쇠능·김을용·정상봉·정재기 선생이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서훈을 받았다. 하지만 서훈받지 못한 73명의 선열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한편 3월의 독립운동가 선정은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 광복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며, 공훈을 기리는 전시가 천안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3월 한 달간 이뤄진다. 전시장에는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등 9점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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