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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2019.02.22 18:44
  • 수정 2019.02.26 00:55
  • 호수 1245

당진 독립만세운동 이끈 유림·천도교·학생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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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특별기고 1 당진지역 독립만세운동 연구현황과 과제
국내 유일의 자수 태극기 만든 당진
“지역 역사연구 보다 세밀하게 이뤄져야”

>> 편집자주_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당진에서도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과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이 이어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번호부터 5회에 걸쳐 김남석 호서고등학교 교사의 글을 연재한다.
 

▲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당시 사용된 남상락 태극기. 국내 유일의 자수로 만든 태극기다.

지난해 3.1절, 99주년 기념식에서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장면이 있다. 바로 의장대가 초창기 태극기들을 앞세우고 입장하는 모습인데, 맨 앞에 등장한 태극기가 바로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당시 사용된 ‘남상락 태극기’였다.

이것은 대호지의 여인들이 하얀 천에 색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도톰하게 만든 태극기다. 어느 민족이 이런 국기를 제작할 수 있을까. 남상락 태극기는 국내 유일의 자수 태극기로, 이러한 주민들 있었기에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은 항일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항쟁의 하나로 기록될 수 있었다.

이에 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당진지역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 보며, 미진한 부분에 대한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말 의병, 당진 독립운동의 뿌리
예전에 어느 분은 많은 사람들이 당진지역 독립만세운동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으로 이해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방 3.1운동의 주동자들이 1919년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발발했기 때문이다. 장례식 참례는 지방 3.1운동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지방 3.1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된 데는 해당 지방마다의 독특한 특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진지역의 지역적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는 당진지역이 한말 의병의 극성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항쟁지가 소난지도였다. 1908년 3월 15일, 일본 경찰의 진압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소난지도 의병항쟁은 대한제국 의병항쟁사의 대표적 의거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소난지도 의병총 옆에 있는 돌각에는 지금도 당시의 총탄 흔적이 무수히 남아있어 그 당시의 전투를 말해주고 있다.

당진지역에는 의병장도 많았다. 송산면 매곡리 출신 최구현(1866~1906), 고대면 용두리 출신 정주원(1870~1925), 송악읍 가교리 출신 도중삼(1878~1907)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부분 양반가 출신으로, 을사늑약(1905)과 군대해산(1907)을 계기로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와 같은 의병항쟁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계승됐고, 독립만세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사상적 배경, 성리학
둘째는 동족마을의 발달과 유학을 중시하는 고을 분위기이다. 당진지역에는 많은 동족마을이 누대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러한 동족마을에서는 문중의 결속과 발전을 위해 서당을 세우고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대표적인 서당으로 대호지면 도이리의 의령남씨 종중에서 세운 ‘도호의숙’을 들 수 있다. 1860년대 초에 설립된 도호의숙은 1906년 유진하(1846~1906)를 훈장으로 초빙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유진하는 화서 이항로(1792~1868)의 문인인 유중교(1832~1893)의 제자로 화서학파의 핵심인물이다.

화서학파는 ‘척사론’을 바탕으로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한 문파였다. 유진하의 척사사상은 대호지의 의령 남씨들에게 곧바로 전파됐고, 후일 4.4독립만세운동의 사상적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 소난지도에 위치한 의병총. 한말 항일 의병항쟁은 당진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씨앗이 됐다.

만세운동의 원동력이 된 천도교
셋째는 당진지역은 천도교가 크게 성행한 곳이라는 점이다. 천도교는 봉건적인 폐습을 타파하고 외세를 배격하고자 등장한 민족종교였다. 동학의 주요 근거지로는 당진 시내의 대덕동과 대호지면 송전리였다. 특히 대호지면 송전리에 거주하던 동학 농민들은 4.4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만세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근대민족학교 출신 학생들
넷째는 한말에 설립된 근대학교의 영향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지켜보던 당진지역 개화지식인들은 근대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 면천면 성상리에 세운 면양학교, 당진읍내에 세운 당성학교, 석문면 통정리에 세운 통명학교, 합덕성당에 세운 매괴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민족학교들을 억압했고, 일본식 공립보통학교(현 초등학교)로 흡수 통합했다. 그 결과 1911년에 설립한 면천공립보통학교의 1회 졸업생 13명이 모두 면양학교 학생들로 구성됐고, 1913년에 설립한 당진공립보통학교의 1회 졸업생 6명 중 3명은 통명학교, 또 3명은 당성학교 출신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총독부는 회유와 억압이라는 방법을 통해 식민지에 길들일 학생육성을 도모했지만, 실제 그 효과는 미미했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민족의식은 3.1운동의 전개와 함께 폭발하고 있었다. 당진지역 독립운동은 전적으로 이분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

김남석 호서고등학교 교사
김남석 교사는
-시곡동 출신
-충남대 사학 전공(문학박사)
-호서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
 

<글 싣는 순서>
1. 당진지역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2.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독립만세운동과 주동 학생들
3.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과 김좌진·한용운 관련설   4. 4.4독립만세운동의 참여인과 이인정, 남주원, 송재만
5. 당진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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