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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사람이야기]대호지의 ‘조금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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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주대감 대호식품·오대한약방부터 마트·이용원서 만난 사람들
“아이들 웃음 끊긴 지 오래…다시 대호지면이 살아났으면”

 

약재향 가득한 오대한약방
대호지면 조금리에 위치한 오대(五代) 한약방의 문을 열면 쌉싸래한 약재향이 풍긴다. 작은 한약방 한편에 칸칸이 약재로 가득 찬 서랍장이 놓여 있고, 그 너머엔 구자강 원장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책상과 의자가 오대한약방의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1942년생인 구 원장의 고향은 서울 창신동이다. 그가 창신초등학교 2학년을 다닐 무렵 6.25 전쟁이 발발했고 피난온 것이 대호지면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서울에 올라갔지만 대호지와의 인연이 생각보다 깊었던지 구 원장은 다시 이곳에 내려와 한약방을 차렸다.

1984년 한약업사 허가증을 취득한 구 원장은 당시 한약방이 없던 석문과 면천, 대호지, 순성 가운데 대호지를 선택해 40세 무렵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엔 한약방이 흔했지만 지금 남은 곳은 오대한약방이 있는 대호지면 조금리와 송악읍 기지시리, 그리고 당진뿐이다.

한편 구 원장의 증조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대대로 한의원을 운영했다. 벌써 구 원장이 이 자리에서 오대한약방을 운영한 지도 30년이 훌쩍 넘었다. 이곳 역시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지금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그런 곳이 됐다. 그는 “서울사람들이야 소문을 듣고도 이 먼 시골 대호지에 있는 한약방에 올 수 있어도, 오대한약방이 서울로 가면 대부분 노인들인 대호지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한약방에 가기 어렵다”며 “그래서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서 일하다 나이가 더 들면 먼저 떠난 아내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고 덧붙였다.

젊은 부부의 153할인마트
대호지 차부(정거장)에는 153대호할인마트와 대호식품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153대호할인마트는 손정훈·김은희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마을에서는 꽤 젊은 50대 부부다. 그래서 손정훈 대표는 대호지면의용소방대 총무부장과 대호지면주민자치위원회 사무국장 등을 맡고 있는 지역 일꾼이다.

▲ 153할인마트 손정훈·김은화 부부

손 대표는 26세 무렵 대호지면 사성리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다 그만 두고 지금의 차부 자리에 정육점을 시작했다. 현재는 한쪽에 정육점을, 또 다른 한쪽에서는 낚시 용품을, 그리고 가운데에서는 마트를 운영하는 나름의 다목적 마트 주인이다.

손 대표의 걱정거리는 ‘줄고 있는 대호지 인구’다. 그래도 전에는 대호지에 송전초와 도성초, 조금초가 있고 중학교인 대호지분교에도 학생이 꽤 많았는데, 하나 둘 폐교되고 남은 곳은 조금초와 당진중 대호지분교뿐이다. 두 학교의 학생 수를 합해도 학생이 70명이 채 안 된다. 그래서인지 새 주인을 기다리는 진열된 장난감에 뽀얗게 먼지가 내려 앉아 있다.

“올해는 대호지가 좀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특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요. 그래도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기초생활거점 육성사업 대상지로 선정됐고, 4.4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인데 대호지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치토스 10봉지 팔았던 시절
바로 옆에는 더 오래된 대호식품이 자리해 있다. “나이는 칠십, 가게는 삼십이 다 됐슈”라고 말하는 박남순 대표가 이곳의 주인이다. 결혼하며 대호지에 온 그는 식품점을 운영하며 아이를 낳고 키웠다. 이제 그 아이들이 40세가 넘었다고. 식품점을 처음 운영할 땐 지금의 가게 절반 크기였다. 그래도 그땐 밤 12시까지 운영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이 곧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이다. 박 대표는 “전에는 하루에 치토스 10봉지는 넘게 팔았다”며 “근데 지금은 한 개도 안 팔려서 아예 없애 버렸다”고 말했다. 그래도 식품점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 할머니들의 사랑방으로 매일 같이 사람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박남순 대표는 “할머니들이 매일 와 이야기 하며 논다”고 말했다.

“단골손님이 최고”
건너편 대호이용원에는 한 글자 또박또박 손으로 적은 이용요금표가 걸려있다. 1969년에 받은 이용사 면허증에는 이병섭 이용사의 앳된 얼굴이 옛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이용사는 정미면 신시리 사람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기술 하나라도 배워보자는 일념으로 17세 때 무작정 상경했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힘들었다. 시골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찾은 서울이지만 부지런히 일해도 방 한 칸 얻기 힘들었다. 그래도 죽기 살기로 남의 장사 터에서 어깨너머 이용기술을 배웠고 군대 갈 무렵 고향 당진을 찾았다.

▲ 대호이용원 이병섭 이용사

서울살이가 너무 힘들었던 그는 배운 기술을 뒤로 하고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가위를 잡았다. 읍내 이발소에서 일하던 그에게 사람들은 “왜 좋은 기술을 썩히느냐”며 이용원 운영을 단골손님들이 권유했다. 응원에 힘입은 그는 조금리에 대호이용원을 문 열었고 어느덧 15년이 지났다.

“오전 8시면 이용원에 나와 손님을 기다려요. 가끔 시간 나면 취미생활도 해요. 장구도 치고 민요도 부르고 태평소도 다루죠. 기지시줄다리기축제가 열릴 땐 농악단으로 참여하기도 해요. 이제는 돈 때문에 살지 않아요. 가족들 건강하고, 이만하면 됐죠.”

“바닷길 걸으며 가끔 ‘땡땡이’도”
석문면 삼봉3리에서 온 신동은 씨와 읍내동에서 거주하는 김선균 씨는 일부러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이다. 김 씨는 이병섭 이용사가 읍내에서 일할 때부터 머리카락을 맡겼다. 오늘 마침 신 씨가 놀러온 김에 함께 이용원을 찾았다.

▲ 적서리 주민 차기부 씨

또 이용원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대호지 적서리에서 나고 자란 79세 차기부 씨다. 차 씨가 조금초등학교를 다녔을 땐 바닷가가 마을 앞까지 들어와 바닷길로 2시간을 걸어 다니며 조금초에서 적서리까지 통학했다. 종종 학교에 가다 힘들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실컷 놀던 때도 있었다. 신발도 없던 시절이라 짚신을 신고 다녀야 했기에 발뒤꿈치는 항상 까져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휴교하는 바람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아쉽기만 하다. 차 씨는 “시골 마을에 뭐가 있었겠냐”며 “그 때는 참 별 것 없었는데, 이제는 재밌는 추억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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