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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8.10.28 20:12
  • 호수 1229

[시론] 허리 굽은 새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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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재 연호시문학회 사무국장

“재훈애미야”
“뭐 하느라고 불러도 문도 안 연다냐”

시계를 보니 다섯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엄니 집과 우리 집은 한마당을 쓰는 한 집 같은 두 집이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기도가 부족한 탓인지 정성이 부족한 것인지 무정하리만큼 얄미웠던 가뭄, 내게 올 여름은 엄니의 딸이 아니라 머슴이었다.

모터에서 단내가 나도록 며칠 동안 물을 품어가며 한 귀퉁이 콩을 심어 놓으면 귀신같은 비둘기는 눈도 밝습디다. 서넛이 불침번 서가며 지켜도 어쩜 그리도 야속하게 싹이 올라는 족족  싹만 잘라먹는지 웬수가 따로 없고 고놈들이 웬수였다.

수십 개의 스프링클러를 돌려가며 이리저리 끌고 다닌 덕에 네 번이나 이음질을 하며 심어놓은 콩밭, 물을 먹지 못해 배배꼬여 겨우 고추 나무라는 명목만 유지하던 고추밭, 키 빼기는 나보다 더 자라면서 씨알이라고는 이갈이 하는 아이만큼도 여물지 못한 옥수수, 늦 손주 입에 오물오물 단물 넣어주려 그 바쁜 봄날 새벽이슬 밟아가며 포도 봉지 씌었더니 까마귀란 놈은 온 식구 줴다불러 포식을 하고, 뿔난 울 엄닌 걸음보다 맘만 앞서 이리저리 뛰어다닙디다.

농사라는 게 어디 맘만으로 지어지겠습니까. 하늘이 지은 농사 땅의 주인 되어 거두고 사는 게지요.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타들어 가던 농심도 잦아들고 서늘한 바람에 이마에 땀이 마를 즈음 또다시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배배 꼬이던 고추나무에 왜 그리도 고추는 많이 열리는 것인지 고놈들은 따고 뒤돌아 서면 잠도 안 자고 붉어지고 엄니는 돈이 열려 좋겠지만도 십 원도 안 생기는 내게는 웬수같은 고추낭구여.

“재훈애미야  즘심도 먹었는디 허리는 왜 자꾸 꾸부러진다냐”

울엄니 미안했는지 씨익 웃으시며 굽어진 허리를 활처럼 늘리고 계신다. 엄니 고것이 밥만  많이 먹는다고 펴지것소? 버선코만큼이나 당당했던 그 젊은 날엔  엄니도 이런 시절이 온다는 거 상상이나 했겠는가.

없는 집에 시집와 엄니 살을 파먹으며 자라온 자식이 넷이나 되다 보니 어디 맘 놓고 놀이나 한 번 제대로 댕겨왔겠는가 눈만 뜨면 엄니는 황토물 든 고무신을 동무 삼아 밭이랑에 나와 계셨겠지. 엄니 내 어려서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소. 엄니라고 왜 고운 모시 한복에 꾀꼬리 깃털 같은 양산을 써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머리 컸다고 엄니의 시커먼 얼굴이 창피해 엄닐 보고도 모르는 척 피해 다니던 내 철 없던 사춘기 이제 엄니 나이가 되고 보니 가슴이 무너집디다.

“엄니는 속도 없소? 그리 굽은 등을 하고도 뭐가 그리 좋으요. 그놈에 일 징그럽지도 않소?”
“니는 아직도 멀었어.  내가 이 힘든 일을 하면서도 왜 웃음이 나오는지 알라면….”
낼 모레가 추석 명절이다.

텅빈 촌가에도 하나 둘 식구들이 모여 들겠지. 아마도 일년중에 울 엄니 발걸음이 가장 가벼울 때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도 울 엄닌 망태기 하나 들고 산으로 향하신다.

올해도 지난해처럼 저 망태기 안에는 굴찍한 알밤이 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굽은 등껍질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주워 담아 오시겠지. 타박하는 딸의 속내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안 무겁다. 그 무서운 가뭄에도 힘들게 열어 주었잖여. 얼마나 고맙냐, 내라도 주워줘야 덜 미안하지”

울 엄니 참으로 오지랖도 넓으셔라. 어찌 고것이 미안함 뿐이것소. 이쁜 내새끼 바리바리 싸주고 싶은 맴이 더 크겠지. 자투리 땅마저도 놀리지 않고 호박이라도 꾹꾹 꽂아 놓으시는건 아마도 언젠가 찿아올 자식의 식량이라는거, 난  이제서 알아가는데 엄니 언제 그리도 늙으셨소. 내 젊은날 가방이 터져라 자꾸만 밀어 넣어주시는 엄니한테 가지고 가야 먹지도 않는다며 자꾸만 덜어내던 내 손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엄니 오십이 넘어서야 조금씩 엄니 맘을 알거 같은데 엄니의 굽은등은 왜  바닦만 바라보려 하는거여. 힘든 농사 일을 하면서도 왜 그리 엄니가 행복해 보였는지, 못난 딸은 이제서야 엄니의 삶에서 세상을 읽어 가는데 엄니 왜 그리도  약해지셨소. 엄니 내 뭐라 안할테니 내년에도 후년에도  알밤 많이 많이 주워오소.

엄닌 알고 있소? 엄니가 이 세상에서 젤로 이쁜 새악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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